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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잡학노트/독립운동가의 회상

롱시티를 떠나며

경제적 독립운동가 2022. 4. 13. 09:39

롱시티에서 처음 살던 아파트 루프탑

변화는 언제나 즐겁다? 변화는 언제나 즐겁다.

 

항상 스스로한테 변화는 좋은것이라며 되내이듯 주문을 걸지만, 거주지의 변화는 언제나 달갑지만은 않다. 갑자기 받은 프로젝트처럼, 이사해야함을 자각 한순간부터 빠듯한 데드라인을 두고 여러집을 저울질해야함은 일상의 숙제가 되버리고, 쉬는 시간에 인터넷에서 렌트 매물을 살펴보는건 어느새 일과가 되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정리되어 쌓여가는 이사짐들은 안전함과 완전함이 갖춰져있던 나의 공간에서 변화와 불완전함 속으로 들어갈 때임을 알린다. 그래서 참 아쉽다. 무엇보다도 정들었던 동네와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 묻어있는 추억과 스토리들을 접어두고 인생의 다음 장 (Chapter)으로 넘어가야한다는 것이 무척 아쉽다. 무엇이던끝은 아쉬운거 같다. 

 

내가 처음 살았던 아파트 거리

간략한 소개를 하자면, 지난 6년간 내가 지내온 롱시티라는 동네는 바로 뉴욕서 강건너에 있는 동네다. 행정구역상 퀸즈 밑에 속해 있으며, 2010년대에 들어서 아주 뒤늦게 개발된 독특한 곳이다. 과거 쓰레기 매립지에서 공장, 공장에서 힙스터/예술가들의 주거지로, 그리고 이제는 고층의 럭셔리 아파트들로 변모하고 있는 롱시티는, 아스토리아, 브루클린, 플러싱 그리고 맨하탄의 연결점인 교통의 요지이다. 이런 요인에서인지 나에게 롱시티는 인더스트리얼 (Industrial)한 느낌과 함께 도시의 세련미가 공존하는, 팔방미인 같으면서도, 묘한 동네다. 한국으로 비교하자면 위치는 여의도 같으나, 동네 분위기나 교통은 사당의 느낌을 많이준다.  

 

빠르게 탈바꿈해나가는 롱시티의 변신은 내가 그곳에 사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았다. 매일같이 울리는 건축/공사 소음들과 그 소음 사이로 달리는 지하철, 그너머로 고층의 마천루가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이내 롱시티는 내가 처음 왔을 때 모습과 현저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 했다. 내가 처음 왔을 적 있었던 공터들과 안쓰이던 오래된 건물들은 신도시스러운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한산했던 동네도 코로나를 지나 젊은 직장인/프로페셔널들로 채워져갔다. 변화와 함께 동네에 함께 하던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바뀌어 나갔다. 처음 동네에 이사왔을적 종종 먹던 태국 배달 음식점, 매일같이 걸어가서 사먹던 라면쉑, 그리고 집 앞에 알수 없는 열지않던 전시관. 모두 각자의 사정과 스토리, 그리고 이유 때문에 롱시티를 떠났다. 당시에는 그저 그들의 떠나감이 아쉬움과 공허함으로 남기만 했으며, 내 차례가 다가온다고는 어리석게도 나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20대 였던 나는 롱시티와 함께 30대가 되었고, 모든 변화는 좋은 것이라던 나도 어느새 본능적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롱시티와 나의 인연은 꽤나 단순하고 흥미롭게 시작한거 같다. 이미 뉴욕으로 직장이 확정되었던 대학교 4학년 때, 걱정반 설레임반으로 뉴욕에서 살 곳을 알아보고 있던 나는 막연하게 맨하탄 밖에만 살면 뉴욕시 세금(New York City Tax)을 안낼거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출퇴근이 용이한 맨하탄 밖의 지역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회사 근처에서 바로 강건너인 롱시티를 처음 알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그리고 롱시티에 살아도 여전히 뉴욕시 세금은 내야한다. 지명은 그렇게 알게되었고, 실제로 살게된 이야기 또한 무대뽀였다. 헤이코리안이라는 미주 한인사이트에 룸메이트를 구하는 리스팅을 통해서 거주를 시작했다. 대부분 경우 살 집을 미리 보고 계약을 하지만, 나는 특이하게도, 아니면 순진하게도, 사진만 보고 계약하여 집을 들어갔다. 

 

눈으로 한번도 본적없는 3 Bed / 1 Bath의 롱시티 거주지는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지금이였으면 좁은 공간과 나눠 사용해야하는 화장실과 부엌 때문에 불편하다고 손사레를 치겠지만 당시에 갓 대학교를 졸업한 정신무장된 나에게는 그 어떤 곳보다 스윗홈이였다. 더더욱이나 감사하게도 계약 후 처음 만나뵙게된 룸메이트 / 집 계약자 형님은 꼼꼼하고 좋은 분이셨다. 형님은 인도네시아서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교는 SVA를 다니고 현재는 뉴욕에서 Lead Compositor로 근무 중이셨다. 이하 형님을 DY형님이라 칭하겠다. DY형님은 룸메이트로서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집안의 크고 작은 일에 솔선수범이셨다. 이후 형님과는 Pearson Street 아파트내에서 형님 여자친구 (추후 아내 분까지)와 다같이 한번의 이사까지 같이하면서 3년을 걸쳐서 같이 살았다. 아쉽게도 DY형님은 결혼과 함께 나와 따로 살게 되었으며, 내 뉴욕에서의 독립기인 인생 제2막을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다.

같이 살던 집의 내 방 view


DY형님과는 2019년 초 헤어져서 따로 살게 되었다. 코로나 직전이였던 당시 나는 롱시티 바로 윗 경계지역인 아스토리아에서 혼자 살게 되었으며 (사실상 롱시티로 간주하겠다) 여기서 1년간 혹독한 독립 데뷔전을 치룬다. 치사한 랜드오너와 불편하고 낙후된 아파트는 전에 집과 DY형님을 떠오르게 만들었으며, 혼자사는 자유 그보다, 조금 혹은 어쩌면 훨씬 많이, 책임의 무게가 내 등을 짗누르게 되었다. 직접 계약자로서 뉴욕에서 랜드오너와 상대한다는게 랜드오너로 누구를 많나냐에 따라 쉬울수도 혹은 엄청나게 어려울수도 있다는 것을 톡톡히 배웠다. 이 글을 빌려서 다시한번 앞서 3년간 뉴욕에서 나를 케어해주신 DY형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싶다.

 

그 1년동안 내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세상도 많이 변하는 시기였다. 세계는 전례없는 유행병인 COVID-19의 창궐로 국경을 닫기 시작했으며, 매일같이 출근하는 직장도 금새 재택근무 모드로 들어섰다. 나는 뉴욕에서 혼자 살고있다는거에 너무나도 감사했다. 코로나라 위험한지도 안위험한지도 모르던 시기에 나스스로를 완전히 격리시킬 공간을 뉴욕에서 가지고 있었다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감사했다. 허나 안전과는 별개로 생활은 너무나도 불편했으며 도전적이였다. 본격적으로 혼자살면서 오른 렌트비를 감당하기엔 Senior로 승진한 당시 나의 월급으론 조금 부담스러웠으며, 그래서 종종 투잡을 뛰면서 데이트레이딩도 했다... 결국에는 Loss로 잃는게 더 많아지게 되었지만 한때는 옵션 트레이딩도 하게되었고 어느정도 수익도 어느시점까지는 가졌었다. 들쭉날쭉한 옵션 그래프만큼 내 포트폴리오도 불안정했고 그에 맞게 내 생활도 불안정해져갔다. 불안정속에서 혼자 지내야하는 삶에 금새 지쳐갔다. 매일같이 청소하고 요리하고 집에서 일하고, 나가서 일하고, 다시 돌아와서 완전히 격리되어서 바쁘게 지내는 시간동안 금방 지쳐갔다. 그래도 부모님께 손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버텼다.


https://goo.gl/maps/Rjh8YeABjBztpsw56

 

롱아일랜드 시티 · 미국 뉴욕 퀸스

미국 뉴욕 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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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던 산책로: 롱시티에서 그린포인트로 넘어가는, 퀸즈에서 브루클린으로 이어지는 Pulaski Bridge

쓰다보니 이리저리 생각나는데로 공상을 주저리 주저리 써내려 간거같다. 글을 멋지게, 맛나게 끝마칠 자신이 없으니, 위에 사진과 함께 글은 이만 마치겠다!

 

나중에 아쉬우면 2편으로 이어 쓰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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