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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잡학노트/독립운동가의 회상

사랑을 찾아서

경제적 독립운동가 2022. 3. 26. 12:35


분노.

어릴 적부터 떠나온 타지 생활/유학 생활에, 내 세상은 불안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고독한 홀로 서기가 길어질수록 나는 거칠어져 갔고 비관적으로, 반쯤 삐딱하게,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불합리하다고 느낀 중학교 시절과 한없이 외로웠던 고등학교를 지나면서 내 안에 분노 자리 잡았으며, 대학시절에는 이 응축된 분노의 에너지를 원동력 삼아 성장의 짜릿함 또한 맛본 경험이 있다. 당시에는 분노를 통해 세상 모든 걸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거 같았고, 이러한 오만과 함께 나는 점점 분노/화의 기운에 잠식되었다.

대학 졸업 후, 뉴욕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한 나는 여전히 분노가 주된 원동력이었고, 분노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아드레날린을 통해 나 스스로를 태우면서 살아갔다. 어떤 이들에겐 별 의미 없는 작은 것들에 마저, 내일이 없다는 생각으로,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생각으로, 모든 걸 걸었다. 그렇게 뉴욕에서의 6년은 분노와 화로 가득 채워졌다.

 

친구와 술 한잔 했던 맨하탄의 루프탑 바

 

뉴욕에 오면서 세웠던 몇 가지 목표 중 하나였던 영주권. 폭발적인 아드레날린을 통해 얻은 성공 들로, 남들보다 조금 일찍 영주권 프로세스를 시작할 수 있었다. 회사 2년 차였던 시점에서 나는 영주권에 사인을 했으며, 이게 추후 나를 어떻게 바꿀 것이라는 것에 당시에 철저히 무지했다. 그저 남들보다 빠르고 잘하고 있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내가 들어서는 마라톤이 얼마나 긴, 종점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인지 몰랐다.

당초 나는 2-3년이면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4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면서, 나는 현재 직장에 묶이게 되었고, 내가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뜻대로 되지 않기 시작했다. 영주권 진행과 함께 이직이 불가 해진 나는 성장의 짜릿함 맛을 잊어갔고, 점점 회사와 종속족인 관계가 되어 갔음을 느꼈다. 하물며 영주권 진행 동안 내 고향 한국마저 마음대로 귀국하지 못하는,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친구들마저 보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점점 나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는 쥐 같았고, 링 한구석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는 권투선수 같았다. 이 놈의 영주권이 내 뜻과 다르게 점점 길어질수록 나 이 모든 걸 타계하기 위해 또 한 번 스스로 분노를 더 키워갔으며, 더 폭발적인 아드레날린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 속에서 나의 내면은 분노의 불길에 전부 다 타버리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 세계는 코로나라는 전무후무한 역병이 돌았으며, 대 격변하는 세계 그 중심 뉴욕에서 나는 미쳐가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큰 변화 들과 함께 4년간 뜨거운 사랑을 하던 소중한 사람마저 나의 분노와 화에 잠식시켜 떠나갔으며, 새로이 만나는 관계들 마저 나의 실수와 잘못 들로 범벅이 되어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의 모든 것 마저 스스로 부정하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으로부터 배워온 따듯한 사랑, 내가 믿는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간 단단한 신뢰, 그리고 내가 세상을 살면서 본능적으로 채득 한 소중한 경험의 자산과 커리어 등등,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 사랑, 소망마저 한 줌의 재로 불타버려 감을 느꼈다. 나는 당시 너무 불행하고 힘들었다.

이 상황 속에 빠지게 된 건 나의 선택이었음에도 나는 답을 밖으로 찾고 있었다. 재가 되어버린 나에게는 분노와 화만 남았었고, 점점 내가 악해짐을 느꼈다. 에리히 프롬이 우리에게 던졌던 소유냐 존재냐의 논제에서 나는 오롯이 소유의 삶을 살고 있었고, 그렇게 철저히 자본주의 부품으로 사용되어갔다. 내게는 4년이라는 지나온 시간 속에 나이가 들어간 나와 사랑하는 부모님, 그리고 그 4년이라는 시간 속 폭발적인 성장을 한 친구들/주변인들이 있었으며, 부러움과 질투라는 감정이 뒤섞여 내게 다가왔다. 4년이라는 시간 앞에서 모든 걸 이길 수 있을 거 같던 나는 한없이 작아졌고, 이 모든 감정들이 깊은 상실감으로 내게 전의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당시 나는 너무 불행하고 힘들었다.

 

에리히 프롬

 

그래서 던졌다. 상실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던 나는 영주권을 진행한 지 3년 11개월이 된 시점에서, 다 포기하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을 갔다. 권투 선수가 패배를 인정하며 흰 수건을 링 위로 던지듯. 내 속에 있는 분노와 화, 불안과 공포,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깊은 상실감을 더 이상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여 살고자 도망쳤다.

 

마이크 타이슨 현역 시절


사랑.

한국에 도착한 나는 답을 찾고자 미친놈처럼 사람을 만났다. 나에게 답을 줄 수 있는 이 같다면 누구든 만났다. 그들은 무슨 원동력으로 삶을 살아갈까 궁금했다. 그 속에서 무수히 다른 삶의 원동력을 가지고 사는 이들을 만났다. 어떤 친구는 도전과 성장의 짜릿함으로 하루하루의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간다 했고, 어떤 친구는 불안을 삶의 원동력으로 생존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어떤 친구는 돈이면 충분한 원동력이 된다 했으며, 어떤 친구는 이런 질문/생각 모두 부질없고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이 무수히 다른 원동력들 중 나에게 맞을 옷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그 답은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돌아온 첫날부터 4년 만에 귀국한 나를 잊지 않고 서울에서부터 먼길을 와준 초등학교 친구와 고등학교/대학교 선배형들. 비관적으로 변한 나에게도 여전히 예전처럼 대해주는 대학교 친구들. 마지막 날까지 한 번이라도 더 보겠다고 먼길을 와주는 룸메형. 내 지난 분노와 상실을 듣고 따듯한 공감과 눈물을 나눠주던 주변 형, 누나, 동생, 친구들. 그리고 무심하고 무뚝뚝하며 먼 타지에서 몇 년간 부모님 품으로 돌아오지 않던 아들을 매일매일 따뜻한 사랑으로 보듬어 주던 부모님. 그 속에서부터 첫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랑.

사랑이란 뭘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건 뭘까?

솔직히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장래희망을 정할 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거처럼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확실히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먼길을 와준 초등학교 동창부터 고등학교/대학교 선배형들, 비관적인 내게 여전히 한결같은 대학 친구들, 마지막 날까지 한 번이라도 더 보겠다고 먼길을 와주는 룸메형, 내 고통과 상처를 함께 나누고 짊어져주는 주변 형, 누나, 동생, 친구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모님의 엄청나고 위대한 사랑. 나는 분명 사랑을 받고, 또 받고 있는 존재였다.

 

마지막 날, 나를 보러와준 대학 룸메이트 형

신이 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내 영주권마저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나왔다. 나는 이번 한국 여행을 통해 사람들에게 사랑을, 신에게 은총을 받기만 하였으며, 그러므로 내겐 엄청난 책임이 빚처럼 있다. 대학교 선배형이 알려주었던 Responsibility의 어원, Response + Ability처럼, 이제는 내가 신이 주신 기회에, 내 주위에서 받은 무한하고 엄청난 사랑에 책임을 지고 신에게 응답할 때가 도래했음을 느낀다. 책임의 빚을 지고 있는 나는 그 응답의 방식을 분노가 아닌, 사랑으로 답해야 할 것이다. 분노가 아닌 사랑을 찾아서.

 

영주권

추신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동안 제 분노를 겪거나 느끼셨던 분이 계셨다면 이 글을 통하여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 보잘것없는 저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사랑합니다.
-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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